게시물 검색

Vol.79 발행월 : 2026. 04

close
게시물 검색

컬처&트렌드 [경남작품집] 풍경 위에서 자라난 경남 문학 - 박경리와 「토지」의 문학 세계

페이지 정보

vol. 78 / 26-03-30 글 김봉임 사진 토지문화재단·박경리문학관·경남문화예술진흥원

본문

경남의 문학을 떠올리면 먼저 풍경이 떠오른다. 남해의 바다, 섬과 항구, 시장과 골목,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경남의 문학은 이러한 풍경 위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향토적 정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삶의 질감 속에서 인간을 묻고, 역사 속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깊은 서사로 확장된다. 통영과 진주, 마산과 하동 같은 경남의 도시들은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토양이 되어 왔다.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역사,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항구의 삶이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냈다. 이곳에서 자라난 문학은 지역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향한다. 경남 문학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역의 풍경에서 출발하지만, 인간과 삶이라는 더 큰 질문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있는 작가가 바로 박경리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장대한 서사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그리고 경남이 낳은 대표적인 문학인이다.


1be300ac35bf53ad8f945cc2e16b69c9_1774877622_0525.jpg
 

지리산 바람이 지나가는 곳

박경리와 『토지』의 문학 세계


지리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평사리 들판을 스친다. 섬진강은 너른 들을 비켜 흐르고, 계절마다 들판의 색은 달라진다. 그러나 이곳에 서면 늘 한 시절의 시간이 겹쳐진다. 1897년 한가위. 대하소설 『토지』가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이다. 지금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있다. “소설 『토지』의 배경.” 박경리의 『토지』는 최참판 일가를 중심으로 소작농과 머슴, 평사리 민초들의 삶을 따라간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의 시간을 관통하는 이야기다. 26년에 걸친 집필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5부 25편으로 이루어진 한국 문학 최대의 서사다. 이 소설에는 무려 600~7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며 시대의 격랑을 건넌다. 토지의 대단함은 700여 명의 등장인물이 누구 하나 소모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 낸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토지』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작품이다.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읽히는 텍스트이고,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만날 법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박경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이더냐.”


이 문장은 『토지』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낸다.


1be300ac35bf53ad8f945cc2e16b69c9_1774878659_6364.jpg
1be300ac35bf53ad8f945cc2e16b69c9_1774878659_7952.jpg
 

상상으로 지어진 세계, 평사리 

『토지』는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작가가 처음부터 이곳을 보고 쓴 것은 아니었다. 박경리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옛이야기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살아갈 공간으로 지리산과 섬진강이 흐르는 들판을 떠올렸다. 참판이 살았음직한 너른 들판. 수 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아갈 공동체. 박경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도 한 장 펼쳐 놓고 토지의 기둥을 세웠다.” 평사리는 실제 지명이었지만, 최참판댁은 철저히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경리가 『토지』를 집필하는 동안, 그리고 완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곳을 직접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다 2001년, 하동군이 소설 속 공간인 최참판댁을 현실로 재현하면서 처음 이곳을 찾게 된다. 그 때 작가가 남긴 말은 단 한마디였다. “아, 다행이다.” 자신이 상상으로 그린 공간이 현실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안도의 말이었다.


1be300ac35bf53ad8f945cc2e16b69c9_1774878459_6447.jpeg
1be300ac35bf53ad8f945cc2e16b69c9_1774878459_6766.jpeg 


소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

오늘의 최참판댁은 소설을 읽은 사람에게는 기억 속 장면을 되살리는 장소이고,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사랑채 누마루에 서면 섬진강과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른 기침을 하며 서 있는 최치수의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다. 안채에서는 강단 있는 윤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고, 연못가에서는 어린 서희가 엄마를 찾으며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주변의 초가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토지』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은 결국 사람 속에서 살아간다.” 이 말처럼 『토지』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공동체의 서사로 읽힌다.



경남 문학의 다음 이야기

경남의 문학은 박경리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통영 출신 시인 김춘수는 「꽃」을 통해 존재와 이름의 의미를 탐구하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천상병은 「귀천」을 통해 인간의 순수와 자유를 노래했다. 이처럼 경남의 문학은 서로 다른 개성과 세계를 지닌 작가들이 만들어 낸 풍성한 흐름이다. 이들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삶의 본질을 향한 질문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오늘날 경남의 문학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지역 곳곳에 문학관과 창작 공간이 생겨나고,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과 창작 활동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문학은 결국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어느 작은 도시의 골목에서, 어느 조용한 책상 앞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박경리의 문학이 한국 문학의 큰 강이 되었듯, 경남의 문학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경남의 풍경과 함께 자라온 경남의 문학.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