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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1 발행월 : 202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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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트렌드 [경남작품집] 경남의 미술, 세계의 언어가 되다 - 이성자 화백과 진주의 예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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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81 / 26-06-30 글 김보배 사진 백동민•이성자기념사업회

본문

경남의 미술은 땅과 가까운 곳에서 출발했다. 진주의 강과 들, 통영의 바다와 섬, 마산의 항구와 도시는 걸출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키운 토양이었다. 오래 바라본 장소의 빛과 색, 사람들의 생활에서 배어 나온 감각은 작가의 손을 거치며 저마다 다른 작품의 언어가 되었다. 진주 출신 박생광 화백은 민화와 불화, 무속의 이미지를 강렬한 색으로 끌어올렸고, 통영 출신 전혁림 화백은 바다와 섬의 색을 현대적인 회화 언어로 풀어냈다. 마산 출신 문신은 조각과 회화를 오가며 대칭과 균형의 세계를 만들었다. 서로 다른 길이었지만, 이들에게 경남은 작품의 출발점이자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감각의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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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시작된 감각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이성자(1918–2009) 화백이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우주의 화가’. 그리고 진주가 낳은 세계적 작가. 그는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회화와 판화, 도자, 모자이크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진주에서 파리로, 대지에서 숲으로, 다시 극지와 우주로. 이성자의 작품은 늘 떠나고, 건너고, 되돌아보는 길 위에 있었다. 그의 그림은 진주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도 않는다. 오히려 멀리 떠났기에, 진주의 산과 들, 오래 몸에 밴 자연의 감각은 더 깊고 조용한 방식으로 그의 작품 안에 남았다. 그래서 이성자의 예술을 따라가는 일은 진주라는 토양에서 시작된 감각이 어떻게 세계의 미술 언어를 만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갔는지 따라가는 일이다.



대지에 남은 기억

이성자 작품세계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여성과 대지’ 연작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대지는 단순한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품는 자리이자, 떠나온 곳에 대한 기억이며, 여성으로 살아온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맞닿은 세계다. 이성자는 산과 들을 점과 선, 면과 색으로 다시 짰다. 캔버스 위에서 땅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무늬가 되고, 결이 되고, 반복되는 리듬이 된다. 멀리서 보면 추상적 질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 만진 흙의 감촉, 밭고랑처럼 이어지는 선, 계절을 품은 땅의 숨결이 스며 있다. 그에게 대지는 돌아갈 수 있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그림 속에서 다시 만들어야 하는 세계였다. 한국전쟁의 시간 속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작가에게 땅은 단순한 배경일 수 없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리였고, 다시 붙잡고 싶은 근원이었으며, 낯선 곳에서 새롭게 세워야 할 삶의 질서였다.


그래서 ‘여성과 대지’ 연작은 고향을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마음속에 다시 일군 땅에 가깝다. 작품 속 어디에도 ‘진주’는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익힌 자연의 감각,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 땅을 살아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시선은 작품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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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지나, 우주로 열리다

이성자의 작품세계는 시간이 흐르며 숲과 도시, 음과 양,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의 관계로 넓어진다. 1978년에 제작된 〈78년 2월의 숲〉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나무와 계절의 이미지는 기하학적 원형과 만나고, 숲은 자연과 우주의 질서가 겹쳐지는 공간이 된다.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숲은 조용하지만 멈춰 있지 않다. 그 안에는 다시 움직이려는 생명, 서로 다른 힘이 맞물리는 긴장, 보이는 세계 너머를 향한 시선이 있다. 이성자의 작품 속 자연은 정지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자리다. 땅과 하늘, 동양과 서양, 고향과 이국, 삶과 예술이 화면 안에서 부딪히고 겹쳐진다. 그의 추상은 차갑게 계산된 형태라기보다, 오랜 이동과 그리움, 사유와 감각이 쌓인 결과에 가깝다.


1980년대 이후 이어진 ‘극지로 가는 길’ 연작에 이르면 그의 시선은 더욱 멀리 나아간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던 항로 위에서,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본 북극과 시베리아의 풍경은 새로운 모티브가 되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땅, 강과 산맥, 빙하와 눈 덮인 대지는 하나의 거대한 추상처럼 펼쳐졌다. 그 항로는 작가에게 삶의 지도이기도 했다. 한국과 프랑스, 떠남과 돌아옴,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던 시간들이 화면 위에 겹쳐졌다. ‘극지로 가는 길’은 지리적 이동의 기록이면서, 멀리 떨어진 세계를 잇고자 했던 한 화가의 정신적 여정이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감각은 프랑스의 아틀리에를 지나, 지구 반대편과 우주를 향해 열렸다.



다시 진주에 남은 그림들

이성자의 예술은 세계를 향해 나아갔지만, 그 긴 여정의 한 끝에는 다시 진주가 있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작품을 고향에 남겼고, 그 작품들은 훗날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으로 이어졌다.  이성자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한 지역에서 시작된 감각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멀리 떠난 예술은 어떻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 지역의 또 다른 얼굴이 되는가. 이성자 화백의 작품은 그 질문에 조용히 답한다. 진주에서 시작된 기억은 프랑스를 지나 세계의 언어가 되었고, 다시 진주에 남아 오늘의 관람객을 만난다. 땅에서 시작해 우주로 향하고, 다시 한 도시의 품으로 돌아온 긴 예술의 여정. 그 길 위에서 경남미술은 한 지역의 기록을 넘어, 세계와 마주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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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미술은 땅과 가까운 곳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땅은 예술가를 가두는 경계가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이성자의 예술이 보여주듯 지역에서 태어난 감각은 세계의 언어가 될 수 있고, 다시 지역으로 돌아와 새로운 기억이 될 수 있다. 지역에서 출발해 세계와 만나고, 다시 그 경험을 지역의 새로운 얼굴로 남기는 것. 그것이 앞으로 경남미술이 이어가야 할 가장 넓고도 단단한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