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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9 발행월 : 202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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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트렌드 [경남의 오래된 미래] 시간을 덧대어 지은 골목, 통영근대역사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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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9 / 26-04-23 글 신혜원 사진 통영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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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늘 쉼 없이 육지를 향해 밀려들지만, 도시는 가끔 잰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내면이 단단해진다. 항구에 정박한 고깃배들의 활기찬 엔진 소리와 펄떡이는 해산물로 가득한 통영의 바닷가에서 불과 몇 걸음 안쪽으로 접어들면, 거짓말처럼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동네가 나타난다. 통영 중앙동과 항남동 일대, 낡은 간판과 낮은 처마가 어깨를 맞대고 굽이굽이 이어지던 골목이 최근 긴 잠에서 깨어나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허물고 새로 짓는 쉬운 길 대신, 금이 간 벽을 다독여 흙을 덧바르고,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대던 낡은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손보며,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낸 옛 가옥과 여관들을 오늘의 문화공간으로 되살려낸 것이다. 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했던 공간들이, 켜켜이 쌓인 시간을 입고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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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지층이 겹겹이 쌓인 통영의 심장부


이 일대는 아주 오랫동안 통영이라는 도시의 중심이자 심장부였다. 조선시대 수군의 본거지였던 통제영의 성 밖 거리가 형성되었던 흔적부터, 대한제국 시기 억척스럽게 바다를 메워 새로운 땅을 넓혀가던 민초들의 땀방울이 서려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수탈을 견뎌내고 해방 이후 구시가지가 누렸던 눈부신 상업적 번영까지, 이 골목 구석구석에는 근현대사가 관통해 온 시대의 지층이 나이테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이 거리를 걷는 일은 단순히 유행하는 레트로풍의 감성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발밑에 놓인 보도블록 하나, 빛바랜 붉은 벽돌 한 장을 눈에 담으며 통영이라는 도시가 어떤 거친 풍파를 견디며 지금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그 묵직한 궤적을 더듬어가는 과정과 같다. 항구로 모여든 사람들의 웅성거림, 여객선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발걸음, 새벽 장을 보러 나선 상인들의 분주한 손끝이 이 좁은 골목의 공기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문화유산’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왕실의 궁궐이나 거창하고 화려한 기념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통영의 이 좁은 골목에서 마주하는 한 칸짜리 여관방과 목조 가옥들은 거창한 역사이기 이전에, 척박한 시절을 버텨낸 사람들의 필사적인 생활의 무게다. ‘예향(藝鄕)’이라 불리는 통영이 배출한 수많은 문인과 음악가, 화가들의 눈부신 예술적 감각들 또한 결국, 이 치열하고도 평범한 하루하루가 모인 골목의 삶에서 태동한 것이다. 삶의 비애와 항구의 생명력이 뒤섞인 이 거리야말로, 통영의 예술을 잉태한 가장 거대하고 훌륭한 캔버스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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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오늘의 공간으로


최근 꼼꼼한 보수와 정비를 마친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과거의 뼈대가 어떻게 남았는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가’에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처럼 차가운 유리 벽 너머로 구경만 해야 하는 거리가 먼 공간이 아니다. 예전의 골조와 건물에 스며든 고유의 분위기는 최대한 훼손 없이 살려두되, 누구나 쉽게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 현대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면 공간마다 새로운 쓸모가 다정하게 부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통영이 낳은 위대한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의 생가는 그의 맑은 예술혼을 기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시인이 어린 시절 글귀를 매만졌을 그 터에서, 오늘의 여행자들은 벽에 적힌 시를 읽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문학적 교감을 나눈다. 또한, 한때 수많은 나그네가 굽은 등을 뉘었을 낡은 여관은 통영의 근대 풍경을 묵묵히 증언하는 흑백 사진 전시관으로 변모했다. 여행의 낭만보다는 생계의 고단함이 먼저 묻어났을 그 좁은 방들은 이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훌륭한 갤러리가 되어 다시금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오랜 세월 통영항을 오가던 이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던 동진여인숙은 머무름의 감각을 일깨우는 특별한 체험 공간으로 새 단장을 마쳤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옛 여인숙 특유의 아늑함이 여행자의 겉옷에 묻은 항구의 바람을 조용히 털어내 준다. 그런가 하면 오랜 세월을 품고 서 있는 김양곤 가옥은, 고소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는 카페로 변신해 옛 주인을 대신하여 여행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 아래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과거의 쓰임새는 다했을지언정 공간이 품은 생명력은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보존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시간을 멈춰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숨결을 현재의 일상으로 순환시키는 일임을 이 거리의 건물들이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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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고쳐 쓰며 나이 들어가는 도시


역사는 단순히 저 멀리 뒤로 물러난 과거의 멈춘 시간이 아니다. 남겨진 것들을 우리가 오늘 어떻게 어루만지고, 또 내일의 쓸모를 위해 어떻게 다시 써 내려갈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현재 진행형의 질문이다. 낡은 것을 지우고 그 자리에 번듯하고 거대한 새 건물을 올리는 일은 어쩌면 가장 쉽고 효율적인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물지 않고 고쳐 쓰는 다소 느리고 수고스러운 길을 택한 통영의 선택은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건축물이 단숨에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공간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사람들의 땀방울과 시대의 체취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깨진 기와를 조심스레 맞추고, 손때 묻은 나무 기둥의 결을 살려내는 이 수고로운 과정은, 도시가 자신의 고유한 표정과 기억을 잃지 않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을 따라 한없이 느려진다.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하게 구획된 현대의 신도시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굽이진 길들. 그 길 위에서 옛 통영 사람들의 분주했던 발자국 위에 오늘의 내 발자국을 가만히 포개어 본다.


오후가 깊어지면 중앙동 골목에는 어김없이 바다에서 불어온 짠 내 섞인 바람이 가만히 머물다 간다. 항구의 비릿함과 오래된 목조 건물의 묵직한 향이 섞인 통영만의 냄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압도적인 규모의 고층 빌딩이 주지 못하는 묘한 위안과 든든함이 이 좁은 골목길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어제의 낡은 여관이 오늘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 되고, 누군가의 고단했던 가옥이 내일의 향긋한 커피 향을 품는 곳. 통영의 골목은 결코 과거에 멈춰 있지 않다. 도시는 또 한 번 이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정성스레 고쳐 쓰며, 변함없는 바다를 곁에 둔 채 조용히 내일을 향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