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지금 트렌드] 책을 읽는 법이 달라졌다. 텍스트힙이 만든 새로운 독서문화
페이지 정보
vol. 84 / 26-09-30 글 김보배본문
책 한 권을 펼친다.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 귀퉁이를 접는다.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주말이면 좋아하는 출판사의 팝업이나 독립서점을 찾아가고, 낯선 사람들과 한 권의 책을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한동안 스마트폰과 영상 콘텐츠에 밀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는 말이 익숙했지만, 요즘 젊은 독자들이 책을 즐기는 풍경은 조금 다르다. 읽는 행위 자체를 자신의 취향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름하여 ‘텍스트힙(Text Hip)’. 텍스트를 읽고 향유하는 것이 멋진 취향으로 받아들여지는 흐름이다. 책은 그대로인데, 책을 읽는 방식이 달라졌다.
![]()
책 읽는 사람이 다시 멋있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젊은 세대의 문화 트렌드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았던 단어는 ‘숏폼’이었다. 몇 십 초짜리 영상이 쉴 새 없이 넘어가고, 긴 글보다 짧고 직관적인 콘텐츠가 주목받았다. 그 흐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강하다. 그런데 그 한쪽에서 정반대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빠르게 넘겨보는 영상 대신 한 권의 책에 오래 머물고, 짧은 자막 대신 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2025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로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하지만 19~29세의 독서율은 75.3%로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았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2026년 상반기 서점가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교보문고 판매 분석에 따르면 소설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19.3% 늘었고,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소설이 8종이나 포함됐다. 특히 온라인 소비에 익숙한 20대가 직접 오프라인 서점을 찾아 책을 구입하는 모습도 두드러졌다.
책 읽기가 다시 젊어졌다.
읽고 끝? 이제는 보여주고 기록한다. 달라진 것은 ‘무엇을 읽느냐’만이 아니다. 책을 즐기는 방법 자체가 훨씬 다양해졌다. 책상 위에 책과 커피를 놓고 사진을 찍는다. 마음에 들어온 문장에 밑줄을 긋고 SNS에 올린다. 좋아하는 문장을 손으로 천천히 베껴 쓰는 필사도 다시 주목받는다. 다 읽은 책의 권수를 기록하고, 독서 앱으로 서로의 책장을 구경하기도 한다. 예전의 독서가 비교적 혼자 하는 취미였다면 지금의 독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나누는 경험까지 포함한다. 단순히 ‘인증 문화’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옷을 입는지가 한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듯,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문장을 좋아하는지도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이 됐다. 책 표지 디자인이 중요해지고, 특별한 장정의 책이나 한정판을 찾고, 책과 어울리는 북커버와 책갈피를 고르는 일도 그 연장선에 있다. 책은 읽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취향을 담는 물건이 된다. 꼭 한 권을 다 읽어야만 독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한 부분만 읽고, 좋아하는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한동안 덮어뒀다가 다시 펼치기도 한다. 정답처럼 정해진 독서법보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
![]()
서점과 도서전도 하나의 ‘놀러 갈 곳’
책을 둘러싼 공간의 모습도 바뀌고 있다. 올해 6월 열린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닷새 동안 약 15만 명이 찾았다. 사전 예매권이 조기에 매진됐고, 개막 첫날에는 문을 열기 전부터 긴 줄이 이어졌다. 연차를 내고 도서전을 찾았다는 직장인도 있었고, 한정판 도서와 굿즈를 먼저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책 축제’에서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던 오픈 런이었다. 도서전 안에서도 책만 팔지 않았다. 출판사마다 개성을 살린 부스를 꾸미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며, 책을 소재로 한 굿즈와 전시, 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올해 행사장에서는 “책이 패션인 게 어때서”라는 문구까지 등장했다. 독립서점 역시 비슷하다. 모든 분야의 책을 두루 갖추기보다 운영자의 취향에 따라 특정 장르나 주제를 골라 소개하고, 북 토크나 독서모임을 열며 독자들이 머물 이유를 만든다. 책을 사러 가는 곳에서 취향을 발견하러 가는 곳으로 역할이 넓어진 셈이다.
혼자 읽던 책, 함께 이야기하다
텍스트 힙의 또 다른 특징은 ‘연결’이다. 책은 가장 사적인 매체 가운데 하나라 똑같은 문장을 읽어도 사람마다 마음에 남는 대목은 다르다. 바로 그 차이가 사람을 모으는 이유가 됐다. 독서모임은 고전을 깊이 읽는 전통적인 방식에서부터 특정 주제의 책을 함께 읽는 모임, 정해진 시간 동안 말없이 책만 읽는 모임까지 형태가 다양하다. 읽은 책의 내용을 분석하기보다 각자의 감상과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도 많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독서 커뮤니티 ‘힙독클럽’이나 야외에서 책을 읽는 서울야외도서관 같은 프로그램도 책을 개인의 독서에서 공동의 경험으로 확장하는 사례다.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이러한 독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기도 했다. 혼자 읽는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읽은 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긴 것이다.
![]()
![]()
빨리 보는 시대에, 천천히 읽는 재미
흥미로운 것은 텍스트 힙이 숏폼의 반대편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5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이 책을 읽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책 이외의 다른 매체와 콘텐츠 이용’은 여전히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스마트폰과 영상 콘텐츠가 차지하는 시간은 분명 크다. 그래서 오히려 책의 ‘느림’이 새로운 매력이 되기도 한다. 영상은 다음 장면을 보여주지만 글은 독자가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 인물의 얼굴도, 방의 모습도, 목소리도 읽는 사람이 상상한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다음 콘텐츠로 넘어갈 수 있는 화면과 달리 책은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물도록 한다. 모든 것이 빨라진 시대에 일부러 천천히 읽고, 문장을 손으로 옮겨 적고, 한 시간 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경험. 효율과는 조금 먼 이 시간이 오히려 새로운 취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텍스트힙’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 전체의 독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 성인 독서율은 여전히 낮고, 책을 읽을 시간과 환경을 갖기 어려운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이 흐름이 반가운 이유는 책과 가까워지는 입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설 한 권으로 시작하고, 누군가는 예쁜 표지가 마음에 들어 책을 집어 든다. 좋아하는 작가의 굿즈를 사려고 도서전을 찾았다가 처음 보는 출판사의 책을 발견할 수도 있고, SNS에서 본 한 문장이 궁금해 책 전체를 읽게 될 수도 있다. 읽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책이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멈춰 생각하게 하고,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한다. 다만 지금의 독자들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있다. 무엇을 읽는지도 나를 보여주는 취향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 책 읽는 사람이 조금 힙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