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토크 [메이드 인 김해] 산업 도시에서 울려 퍼진 하모니 - 창원근로자합창단 ASSA 라승균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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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80 / 26-05-29 글 김보배 사진 백동민본문
산업도시 창원. 용접 불꽃이 튀고 기계음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공단 한복판에서, 매주 수요일 밤이면 전혀 다른 진동이 퍼져나간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선 채로 일했고, 누군가는 야근을 마치고 곧장 달려왔다. 그러나 연습실 문을 여는 순간, 이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창원근로자합창단 ASSA. 15년 넘게 이 특별한 공동체를 이끌어온 사람, 라승균 지휘자는 이 합창단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는 단순한 애정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음악을 떠났던 시절, 다시 삶의 중심을 잡아준 것이 바로 이 합창단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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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공단에 색을 입히다
라승균 지휘자가 ASSA를 처음 맡게 된 계기는 단순한 제안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회색빛 공단에 다채로운 문화의 색을 입히자”는 취지로 시작된 공단·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사업을 보며, 노동자들의 일상에 음악이 스며드는 장면을 상상했다고 한다. “그 시절 노동자들은 업무 외에는 가정과 회식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목소리로 가족을 위해 노래한다면 얼마나 뜻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 합창을 선택했다. 그렇게 창원 산업단지 한복판에,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탄생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휘한다는 것
ASSA의 단원들은 모두 비전공자다. 서로 다른 직업, 다른 생활 리듬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라 지휘자는 합창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합창의 매력은 ‘다른 소리가 모여 하나의 소리를 만들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이에요. 회사도 마찬가지잖아요.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는 것. 합창과 닮아 있어요.” 비전공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기본 발성’.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이 따라오지 않는 그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기다림을 선택한다.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결국 몸이 기억하는 순간이 와요. 저도 단원들의 일을 하라고 하면 똑같이 힘들 거예요. 그러니 천천히 가자고 말합니다.”
벽이 없는 합창단
ASSA 연습실의 가장 큰 특징은 ‘벽이 없다’는 점이다.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지휘자와 단원 사이에 수직적 관계가 생기면 질문이 사라지고, 결국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그는 여러 현장에서 경험해왔다. 그래서 ASSA에서는 궁금한 것은 바로 묻고, 웃음이 나면 함께 웃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합창단과 함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그는 잠시 웃으며 말했다. “자발적으로 안무를 만들고, 서로 가르치고, 그걸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순간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뿌듯해요.”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단원들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연습을 시작하고, 합창단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을 스스로 키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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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는 사람의 어울림
라승균 지휘자에게 하모니는 단순한 음의 조화가 아니다. 그는 하모니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단원들에게 가장 자주 건네는 말도 의외로 소박하다. “우리 못해도 돼. 대신 자신 있게 노래해. 우리는 프로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야 해. 정리 잘하고 나가자. 이 두 가지는 늘 강조합니다.” 음악적 완성도보다 ‘함께 부르는 경험’을 우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오는 단원들에게 음악은 또 하나의 숙제가 아니라, 즐거움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거워야 관객도 즐거워하더라고요.” ASSA에서의 경험은 기획자로서의 시야도 넓혀주었다. 최근 라 지휘자는 경남국제합창제 기획실장을 맡았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큰 도전이다. “선임자들이 잘 닦아놓은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저도 배우는 단계지만, 경남과 창원의 합창문화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아마추어 합창단을 이끌며 쌓은 감각이 초청팀을 선정하고 무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도시 창원에서 ASSA가 갖는 의미
창원은 대한민국 대표 산업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근로자 합창단이 15년 넘게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ASSA는 지역에서 부르면 어디든 달려간다. 특히 산업단지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평균 연령이 올라가는 합창계에서 ASSA는 비교적 젊은 편이고, 몇 안 되는 혼성합창단이에요. 창원 유일의 산단 기반 합창단이기도 하고요. 15년 동안 묵묵히 노래하며 지역 합창 문화에 조금은 보탬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단원들의 일상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퇴근 후 곧장 연습실로 향하는 시간이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휴식이 되었고, 무대에 선 부모의 모습을 지켜본 자녀들은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부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떤 단원은 NC다이노스 경기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자신의 모습을 TV로 본 아버지가 “맨날 합창하러 다니더니 이런 데도 나오네”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단원들에게도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날에도 “오늘 연습 가야지”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고, 무대에서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들이 공연장을 찾으며 단원의 삶을 응원하는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직장 동료들 역시 공연 소식에 격려를 건네는 등, 합창이 단원들의 사회적 관계까지 넓혀주는 긍정적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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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보다 ‘함께’라는 가치
라 지휘자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어느 계층보다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뜨겁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라고. 합창이 노동자들에게 주는 공동체적 의미도 분명하다. “합창은 서로의 이해가 동반되어야 완성됩니다. 가정도, 직장도 마찬가지죠.” 타인의 음정을 듣고, 타인을 위해 소리를 내는 것. 그는 그것이 가장 좋은 합창이고, 좋은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원들도 그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삶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ASSA와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목표는 없습니다. 이미 잘하고 있으니까요.” 목표를 세우는 순간 단원들이 가족보다 합창을 우선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작은 꿈 하나를 들려주었다. 단원들과 가족처럼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질문. 그에게 ASSA란 어떤 존재인가.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음악을 떠났던 제게 다시 음악을 하게 해준 곳,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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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근로자합창단 ASSA의 노래는 단순한 취미 활동의 결과물이 아니다. 산업도시의 일상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해의 소리’다. 라승균 지휘자가 말한 것처럼, 하모니는 결국 사람의 어울림에서 완성된다. 회색 공단 위로 울려 퍼지는 그들의 목소리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움직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