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지금 트렌드] 1분짜리 드라마에 빠지다! 세로형 숏드라마가 바꾼 콘텐츠의 문법
페이지 정보
vol. 83 / 26-08-24 글 김보배본문
지하철을 기다리는 몇 분, 점심을 먹고 남은 짧은 휴식, 잠들기 전 무심코 넘기던 스마트폰 화면. 그 틈으로 드라마가 들어왔다. 한 회에 한 시간이 아니라 단 1분 남짓. 화면을 가득 채우는 세로형 영상 속에서 인물은 사랑에 빠지고, 배신을 당하며, 숨겨진 비밀과 마주한다.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반전이 등장하고,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다음 회를 향한다. 짧은 영상을 뜻하는 ‘숏폼’이 예능과 드라마의 주요 장면을 잘라 보여주는 방식에서 나아가, 처음부터 짧은 호흡에 맞춰 제작되는 ‘숏드라마’로 진화하고 있다. 1~3분 안에 갈등과 반전을 압축한 새로운 영상 문법이 시청 습관뿐 아니라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 유통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
세로 화면에 들어온 드라마
숏드라마는 스마트폰으로 감상하기 쉽도록 주로 세로 화면으로 제작하는 짧은 연속극이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 회가 1~2분 안팎이며 수십 회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짧은 영상이라고 해서 기존 드라마를 단순히 요약하거나 잘라낸 것은 아니다. 대본과 배우, 연출을 갖추고 처음부터 모바일 시청 환경에 맞춰 만든 하나의 독립된 장르에 가깝다. 가로로 넓은 TV 화면에서는 여러 인물과 배경을 한 장면에 담을 수 있지만, 세로 화면은 인물 한두 명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얼굴 표정과 눈빛을 가까이 보여주는 클로즈업이 많고, 복잡한 공간보다 대사와 감정의 충돌이 장면을 이끈다. 스마트폰 화면의 모양이 단순히 영상 비율만 바꾼 것이 아니라 촬영과 연기, 편집 방식까지 바꾼 셈이다. 숏드라마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일상 깊숙이 침투한 숏폼 콘텐츠의 파급력 때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5 콘텐츠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숏폼 콘텐츠 이용률은 58.6%였다. 이용자들은 ‘짧아서 부담이 없어서’, ‘재미있는 부분만 보려고’, ‘추천 알고리즘 때문에’ 숏폼을 본다고 답했다. 영상 이용 기기 역시 스마트폰이 91.7%로 가장 높았다. 콘텐츠를 긴 시간 집중해 보는 대신 짧은 시간 여러 영상을 연속해서 소비하는 환경이 숏드라마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된 것이다.
1분 안에 위기와 반전을 넣는 법
기존 드라마는 인물과 배경을 천천히 소개하고 사건의 원인을 쌓아가며 시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숏드라마에는 그럴 시간이 없다. 시작과 동시에 파혼을 당하거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평범해 보이던 주인공이 재벌가의 후계자로 밝혀진다. 등장인물의 관계는 자막이나 짧은 대사로 설명하고, 일상적인 장면은 과감하게 건너뛴다. 숏드라마에서는 한 회 안에서도 갈등과 위기, 작은 결말이 빠르게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몇 초에는 다음 회를 보게 만드는 새로운 사건을 던진다. 문이 열리며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충격적인 말을 듣는 순간 화면이 멈춘다. 기존 드라마가 한 회 전체에 걸쳐 만들던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숏드라마는 1분마다 반복한다. 덕분에 이야기의 속도는 빨라지고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인물은 복잡한 속내를 길게 설명하기보다 사랑과 분노, 복수와 욕망을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재벌가의 비밀, 계약연애, 신분 반전, 복수극처럼 짧은 시간 안에 관계와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소재가 많이 활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은 빠른 전개와 연속되는 반전은 짧은 영상에 익숙한 이용자에게 강한 몰입감을 준다. 한 편은 1분이지만 다음 회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한 회에 가까운 시간을 숏드라마에 쓰게 된다. ‘잠깐만 보자’고 시작했다가 수십 회를 넘겨보는 것이다.
![]()
스타 배우와 영화감독도 세로 화면으로
초기의 숏드라마는 신인 배우와 소규모 제작사가 참여하는 실험적인 콘텐츠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장이 커지면서 기존 영화와 방송에서 활동하던 감독과 배우들도 세로 화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을 연출했고, 고주원·박한별·박하선·이동건·홍수현 등 기존 드라마에서 익숙한 배우들도 숏폼 작품에 참여했다. 이는 숏드라마가 주변적인 콘텐츠를 넘어 하나의 제작시장으로 자리를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용 플랫폼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릴숏과 드라마박스 등이 시장을 키웠고, 국내에서도 비글루와 숏차를 비롯한 숏드라마 서비스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기존 영상 플랫폼이 완성된 작품을 편성하는 방식과 달리, 숏드라마 플랫폼은 이용자의 시청 기록과 이탈 시점, 선호 장르 등을 분석해 다음 작품의 기획과 제작에 반영하기도 한다. 콘텐츠가 공개된 뒤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의 반응 자체가 새로운 제작의 재료가 되는 구조다. 최근에는 웹진 씨네플레이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제1회 코리아 숏드라마 어워즈’를 마련했다. 별도의 시상식이 생겼다는 사실은 숏드라마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독자적인 영상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신호. 이런 흐름에 발맞춰 한국영상자료원은 수상작의 아카이브 지원도 준비하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 숏드라마를 만나다
숏드라마 시장이 커지면서 웹소설과 웹툰도 새로운 원천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이미 독자에게 검증된 이야기와 캐릭터를 갖춘 웹소설·웹툰은 짧은 시간 안에 강한 갈등을 보여줘야 하는 숏드라마와 잘 맞는다. 짧은 회차마다 사건과 반전을 배치하고 다음 편에 대한 궁금증을 남기는 연재 방식도 닮았다. 하나의 웹소설이 웹툰과 드라마, 영화로 확장돼 온 것처럼 앞으로는 숏드라마가 IP 확장의 첫 관문이 될 수도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과 적은 제작비로 이야기를 영상화해 이용자의 반응을 살펴보고, 흥행 가능성이 확인되면 장편 드라마나 영화로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존 인기 드라마의 외전이나 조연의 이야기를 숏드라마로 제작해 작품의 세계를 넓힐 수도 있다. 해외 진출에서도 유리한 점이 있다. 회차가 짧고 대사와 인물관계가 비교적 단순해 자막과 더빙을 적용하기 쉽고, 국가별로 배우와 배경을 바꿔 현지판을 만들기도 수월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우리나라가 웹툰·웹소설 IP와 드라마 창작 인력을 갖춘 만큼 숏폼 드라마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다.
지역의 이야기도 1분 안에 담길까
숏드라마의 확장은 지역 콘텐츠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존 장편 드라마나 영화는 많은 제작비와 긴 촬영기간이 필요해 지역의 작은 제작사나 창작자가 도전하기 쉽지 않았다. 반면 짧은 형식은 한정된 장소와 인물로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지역의 골목과 시장, 오래된 건축물, 설화와 역사, 청년들의 일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전국과 해외 시청자를 만날 수 있다. 경남의 웹툰과 웹소설, 지역작가의 이야기도 숏드라마의 원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지역의 설화를 현대적인 미스터리로 바꾸거나, 오래된 원도심을 배경으로 청춘 로맨스를 만들고, 지역 예술가의 삶을 짧은 연작으로 풀어낼 수 있다. 한 장소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인물의 사건과 감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이면 지역의 풍경 자체가 작품의 개성이 된다. 지역 영상산업의 관점에서도 숏드라마는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신인 작가와 배우, 촬영·편집 인력이 짧은 작품을 통해 경험을 쌓고, 반응이 좋은 콘텐츠를 더 큰 프로젝트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에 드라마의 옷만 입히는 것이 아니다. 시청자가 먼저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뒤에 장소와 문화가 기억되도록 해야 한다.
짧다고 가벼운 것은 아니다
숏드라마의 성장에는 우려도 따른다. 매회 이용자의 시선을 붙잡아야 하는 구조 때문에 자극적인 소재와 비슷한 서사가 반복될 수 있다. 빠른 제작 일정과 낮은 제작비 경쟁이 심해지면 창작자와 배우, 제작 인력의 노동환경이 불안정해질 가능성도 있다. 짧은 콘텐츠일수록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인식과 달리, 1분 안에 인물과 사건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려면 더욱 치밀한 기획과 편집이 필요하다. 결제 방식도 풀어야 할 과제다. 일부 플랫폼은 초반 회차를 무료로 보여준 뒤 다음 내용을 보기 위해 회차별 결제나 광고 시청을 요구한다. 이용자가 전체 작품의 가격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소액 결제를 반복하지 않도록 투명한 안내가 필요하다. 웹소설과 웹툰을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원작자와 영상 제작자 사이의 정당한 권리 배분도 중요하다. 숏드라마가 오랫동안 사랑받기 위해서는 빠른 속도만큼 이야기의 완성도를 갖춰야 한다. 익숙한 반전과 자극적인 갈등을 반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짧은 형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감정과 미학을 발견해야 한다. ‘짧아서 보는 콘텐츠’에서 ‘짧기 때문에 더 강렬한 콘텐츠’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인물과 함께 긴 호흡으로 걷는 이야기라면, 1분의 숏드라마는 매 순간 급커브를 도는 콘텐츠에 가깝다. 아직은 낯설고 다듬어야 할 부분도 많지만, 전용 플랫폼과 제작지원, 시상식까지 등장하며 새로운 산업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세로로 든 순간 시작되는 짧고 강렬한 이야기. 다음 회를 누르게 만드는 그 1분이 지금 영상 콘텐츠의 문법을 다시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