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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5 발행월 : 202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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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 [로컬의 재발견] 가을, 오래된 시간을 걷다 - 거창 VS 고성, 경남 역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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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85 / 26-10-29 글 김보배 사진 백동민 고성군청

본문

가을에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좋다. 바람이 선선해지고 산과 들의 빛깔이 달라지면,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도 새롭게 보인다. 그 길 위에 오래된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어떨까. 경남 곳곳에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벽화가 숨겨진 산자락부터 소가야 사람들이 잠든 고분, 수천만 년 전 공룡이 남긴 발자국까지. 올가을에는 단풍만 좇지 말고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걸어보자. 산과 마을을 지나 황금빛 가을에 닿는 거창, 고대의 무덤에서 공룡의 발자국을 거쳐 저녁 바다로 이어지는 고성.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가을 역사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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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1. 경남 거창

고려의 시간을 지나 황금빛 가을 속으로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 금귀봉·보해산 → 거창 은행나무길]

거창의 역사산책은 조용한 산자락에서 시작한다. 남하면 둔마리에 자리한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이다. 고려시대인 12~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무덤은 소박한 겉모습과 달리 귀한 흔적을 품고 있다. 바로 무덤 안에 남아 있는 벽화다. 검은색과 녹색, 갈색으로 그려진 벽화에는 선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과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 무덤 벽화 자체가 드문 데다 당시의 예술과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백 년 전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곳이 오늘날에는 한 시대를 들여다보는 창이 되었다. 산등성이에 자리한 작은 무덤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니.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 사연을 알고 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시선을 산으로 돌려보자. 금귀봉과 보해산은 거창의 가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두 산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함께 산행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봉우리에 오르면 거창의 산과 들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굽이치는 산등성이 너머로 크고 작은 마을들이 내려다보인다. 여름 내내 짙었던 초록은 어느새 노랑과 붉은빛으로 물들고, 능선을 스치는 바람에도 가을 기운이 묻어난다. 꼭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좋다. 한 걸음씩 산길을 오르며 조금씩 멀어지는 마을과 겹겹이 이어지는 산의 윤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계절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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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와 향할 곳은 거창읍 학리 의동마을의 은행나무길이다. 평소에는 소박하고 한적한 마을길이지만 가을이면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 보인다. 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가 일제히 노랗게 물들고, 바람에 흩날린 잎들이 발아래 수북이 쌓인다. 나무 위도, 길 위도 온통 황금빛이다. 거대한 숲도, 끝없이 이어지는 산책로도 아니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이 길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오래된 마을의 낮은 지붕과 골목, 그 사이를 채운 노란 은행잎이 어우러져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가을 풍경을 만들어낸다. 서둘러 걷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고 싶은 길이다. 고려의 벽화에서 시작해 산등성이를 지나 은행나무길에 닿는 하루. 거창에서는 역사가 특별한 유적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래된 마을과 산길, 계절이 오가는 풍경 속에서도 시간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수백 년의 이야기를 품은 땅 위로, 올해도 어김없이 황금빛 가을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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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2. 경남 고성

소가야에서 공룡시대까지, 바다를 따라 걷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 상족암군립공원 → 해지개 해안둘레길]


거창이 산과 마을 사이에 숨겨진 역사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고성에서는 시간의 폭이 한층 넓어진다. 그 첫걸음은 고성읍 한가운데 자리한 송학동 고분군이다. 완만한 언덕을 따라 크고 작은 봉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멀리서 보면 그저 잘 다듬어진 푸른 언덕 같지만, 그 아래에는 1,500여 년 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소가야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송학동 고분군은 주로 5~6세기에 조성된 소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발굴 과정에서 토기와 장신구, 무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으며,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흔적도 확인됐다. 이를 통해 소가야가 남해안을 무대로 교류하며 성장했던 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과 함께 ‘가야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막상 이곳을 걸으면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보다 평화로운 풍경이 먼저 다가온다. 둥근 봉분 사이로 산책길이 이어지고, 언덕에 오르면 고성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권력과 위엄을 상징했을 무덤 위로 이제는 풀과 꽃이 자라고, 사람들이 오가며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간다. 천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무색할 만큼 고대의 흔적은 오늘의 삶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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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동에서 바다를 향해 발길을 돌리면 시간은 더욱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족암군립공원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시간의 단위가 달라진다. 해안 바위에 움푹 파인 자국들. 중생대 백악기, 이 땅을 거닐던 공룡의 발자국이다. 수천 년도, 수만 년도 아닌 수천만 년 전 생명이 남긴 흔적이다. 바닷물이 빠진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퇴적암층 위에 남은 공룡 발자국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바위에 패인 작은 웅덩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슷한 자국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것을 발견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은 파도가 밀려오는 이곳을 한때 거대한 공룡들이 걸어 다녔다니. 상상 속에나 존재하던 먼 과거가 발아래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상족암의 볼거리는 발자국뿐만이 아니다. 얇은 지층이 켜켜이 포개진 해안 절벽과 파도가 오랜 세월 깎아 만든 해식동굴, 그 너머로 펼쳐지는 남해가 장관을 이룬다. ‘상족암’이라는 이름도 바위 아래 모습이 밥상 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위에 새겨진 무늬와 층층이 쌓인 지층이 눈길을 붙잡는다. 사람이 남긴 기록보다 훨씬 오래된 지구의 역사가 이곳에서는 책장이 아닌 바위의 결을 따라 펼쳐진다. 아득한 과거를 지나온 고성의 시간 여행은 해지개 해안 둘레길에서 다시 오늘로 돌아온다. 고성읍 남포항 일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바다 위로 뻗은 해지개다리가 대표적인 볼거리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걷기 좋은 이 길은 특히 해 질 무렵 더욱 아름답다. 낮 동안 반짝이던 바다가 서서히 붉은빛을 머금고, 멀리 산과 섬의 윤곽이 저녁 빛 속으로 스며든다. 다리 위에 잠시 멈춰 서면 잔잔한 바다와 그 위로 번지는 노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송학동에서 1,500여 년 전 소가야를 만나고, 상족암에서 수천만 년 전 공룡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하루. 그렇게 아득한 과거를 오간 여행은 저녁 바다 앞에서 다시 오늘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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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시간, 거창 VS 바다의 시간, 고성

거창에서는 산과 마을 사이에 머문 옛이야기를 만나고, 고성에서는 고대의 무덤과 공룡의 발자국을 따라 까마득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걷는 길도, 마주하는 풍경도 다르지만 두 여행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풍경이 오랜 시간의 흔적 위에 놓여 있다는 것. 가을은 그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낙엽이 쌓이고,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그렇게 수많은 계절과 이야기가 쌓여 오늘의 풍경이 되었다. 올가을, 조금 천천히 걸어보자. 어쩌면 늘 지나치던 길 위에서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