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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9 발행월 : 202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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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토크 [주목 청년] 글씨로 시간을 헤엄치다 - 이야기 위에 획을 긋는 캘리그라피 작가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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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9 / 26-04-23 글 김보배 사진 백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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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 종이에 스며드는 순간, 글씨는 더 이상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번짐과 여백, 획의 속도와 방향이 만들어내는 리듬 속에서 글씨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때로는 풍경이 된다. 김해에서 활동하는 캘리그라피 작가 권은경 씨의 작업이 바로 그렇다. 2013년부터 이어온 그의 작업은 단순히 ‘글씨를 쓰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문자와 이미지, 지역의 역사와 개인의 감각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예술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 열린 네 번째 개인전 〈글씨로 헤엄치는 신어〉는 그 여정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준 전시였다. 김해 설화 속 존재인 ‘신어’를 통해, 이 도시가 품어온 시간과 기억을 글씨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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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이미지로 바라보는 순간

권은경 작가가 캘리그라피를 시작한 것은 서울필묵아카데미에서 김종건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글씨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배웠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이 ‘한글의 회화화’였어요. 글씨를 읽는 문자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안에서 하나의 이미지이자 조형 요소로 바라보는 시선이 제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죠.”


그에게 글씨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이면서 동시에 형태와 리듬을 지닌 시각적 존재였다. 초기에는 좋은 문장과 이미지를 결합한 작업에 집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은 ‘글씨가 화면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했다. 문자와 공간,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확장되면서 문인화와 한국화, 수채화 등 회화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호기심이 지금까지 작업을 지속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작가로서 중요한 전환점은 김해문화관광재단으로부터 받은 허왕후 신행길 관련 작품 의뢰였다. 이전까지 그의 작업에는 ‘꽃’이라는 글자가 자주 등장했지만, 이 작업을 계기로 시선은 김해라는 도시와 가야의 역사, 설화로 옮겨갔다. “지역의 역사와 상징을 글씨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 제 작품 세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죠.” 이후 김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서사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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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로 헤엄치는 신어

네 번째 개인전 〈글씨로 헤엄치는 신어〉는 이러한 변화가 집약된 전시였다. 전시의 중심에 놓인 ‘신어(神魚)’는 김수로왕 설화와 관련된 상징적 존재로, 오랫동안 지역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신비로운 물고기다. 작가는 이를 단순한 이야기 소재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을 품은 존재로 해석했다. “신어는 김해라는 땅이 품고 있는 시간과 기억을 상징한다고 느꼈어요.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처럼요.”


그래서 그의 화면 속 신어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지금도 물결 속을 유영하는 생명처럼 표현된다. 작품 속 문장처럼 말이다. 신어의 숨결, 내 마음의 바다를 감싸고 쉬지 않는 물결로 나를 지키네. 천 년의 시간을 헤엄치며 이 땅을 지켜온 존재, 그것이 작가가 바라본 신어였다.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재료의 다양성이었다. 먹과 한지뿐 아니라 숯, 분청도자기의 질감이 어우러졌다. 분청의 거친 표면, 숯의 깊은 색감, 먹의 번짐은 자연과 시간의 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 재료들이 가야의 역사성과 김해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글씨가 문자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의 질감을 가진 이미지로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결과 작품은 캘리그라피를 넘어 회화적 화면에 가까운 밀도를 보여준다. 


길이 약 10미터에 이르는 대형 작업은 화제였다. ‘하늘’, ‘땅’, ‘바다’라는 글자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김해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신어가 유영하는 세계를 순환 구조로 표현했다. 관람객은 작품 앞을 걸으며 글씨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고, 획의 리듬과 여백이 이어지며 화면은 마치 물결처럼 펼쳐진다. 글씨를 ‘읽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며 경험하는’ 작업인 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글씨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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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라는 도시가 남긴 흔적

권은경 작가에게 김해는 삶의 터전이자 오랜 역사와 설화를 품은 공간이다. 가야의 이야기와 풍경은 그의 필획과 여백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에게 현실은 쉽지 않지만, 동시에 김해와 가야라는 서사는 작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지역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건 오히려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힘이 돼요.”


이번 전시에서도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작품을 담은 달력 형식의 도록 제작은 작가에게 의미 있는 시도였다. 전시장에서만 머무는 기록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계속 사용될 수 있는 형태로 작품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씨라는 예술 언어

권은경 작가는 캘리그라피를 서예 전통 위에 세워진 현대적 표현 예술로 바라본다. 문자의 구조와 필법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그 위에서 새로운 변형과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기초를 강조한다. 깊이 있는 조형적 고민과 미적 감각이 더해질 때, 캘리그라피 역시 독립된 예술 장르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그는 평면 작업을 넘어 공간 작업으로의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신어’의 형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꼬리의 곡선과 움직임의 리듬을 변화시키며, 신어가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형상을 연구하는 단계다. 재료 실험 역시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먹과 한지뿐 아니라 흙, 숯, 금속 등 자연의 물성을 가진 재료들이 그의 다음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권은경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한 장의 작업이 누군가의 하루에 잠시 머물고, 마음 한편에 잔잔한 물결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글씨를 통해 지역의 이야기와 시간을 새로운 이미지로 풀어내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의 글씨 또한 그렇게 사람들 곁에 남을 것이다. 먹이 종이에 스며들 듯,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