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트렌드 [인문학 경남여행] 자연을 닮고자 하는 마음 - 합천의 누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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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2 / 25-07-23 글 정성욱 사진 합천군 경남문화예술진흥원본문
천년 고찰 해인사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홍류동 계곡을 지나 황강으로 이어지고, 그 곁에는 수백 년을 견딘 누각과 정자들이 있다.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풍경은 흐르지만, 누각과 정자는 늘 그 자리에 머문다. 합천의 누정은 단지 경관 좋은 쉼터가 아니다. 수려한 자연에 기대어 사유하고 자신을 돌아보려 했던 선비들의 뜻이 서린 건축이다.
함벽루
01. 처마의 빗물이 강물로 떨어지는 유일한 누정, 함벽루
합천 8경 가운데 제5경으로 꼽히는 함벽루는 빗물이 처마 끝에서 곧장 황강으로 떨어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구조를 지닌 누정이다. 고려 충숙왕 8년, 합주(합천의 옛 지명) 지주사 김영돈이 창건한 이래 수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뒤로는 매봉산이, 앞으로는 넓은 황강과 모래톱이 펼쳐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 강 건너에서 보면 연호사와 함께 떠 있는 듯한 이중 풍경이 펼쳐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함벽루는, 규모는 소박하지만 안에 담긴 정신은 묵직하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시판, 송시열의 암각문이 그 자리를 증명한다. 고려의 문인 이첨은 밤에 이곳에 올라 이렇게 노래했다.
신선 허리의 패옥소리 뎅그렁뎅그렁
높은 다락에 오르니 푸른 창이 벽에 걸려있네
밤이 되자 다시 유수곡을 타니
수레바퀴 같은 밝은 달이 가을 강을 비추네
시구 속 장면처럼 함벽루에 오르면 기둥 사이로 드러나는 바위 벽과 물빛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다. 지금도 이곳에 서면 황강의 물결이 마음을 따라 흐르고, 연호사와 나란히 선 누각의 풍경이 그윽한 여운을 남길 것만 같다.
농산정(해인사 소리길)
02. 구름처럼 떠돌다 머문 마지막 자리, 농산정
가야산 홍류동 계곡 입구, 울창한 숲과 바위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 농산정은 고운 최치원의 마지막 자취가 깃든 곳이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을 날렸지만, 신라의 골품제 앞에서 뜻을 접고 구름처럼 전국을 떠돌던 그가 마지막으로 은거한 자리가 이곳이다. 그가 남긴 시 〈제가야산독서당〉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속세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염려하여,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실제로 농산정은 자동차 소리조차 닿기 어려운 깊은 바위 사이에 놓여 있다. 원래 이름은 ‘독서당’이었으나, 그의 시에서 유래한 ‘농산정’이란 이름이 후대에 붙게 되었다. 지금의 정자는 1922년 해체 복원되었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담백하게 서 있다. 정자 옆에는 ‘고운최선생둔세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발아래 암반에는 최치원의 시가 흐릿하게나마 새겨져 있다. 농산정에서 해인사까지는 10리 남짓. 정자 곁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소리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가 남긴 마지막 마음이 숲과 물소리에 실려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하다.
호연정의 배롱나무 꽃
03.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기르다, 호연정
황강을 따라 율곡면 문림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휘어진 기둥과 껍질을 벗긴 나무들로 지어진 정자 하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주이(周怡)가 벼슬을 내려놓고 학문 연마와 후진 교육을 위해 지은 호연정. 그 이름은 맹자의 ‘호연지기’에서 따온 것으로, 흔들림 없는 마음과 도덕적 용기를 뜻한다. 호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가지를 그대로 살린 나무 기둥과 굽은 창방 그리고 경(敬)이라는 편액이 놓인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의 손보다 자연의 결을 따르고자 했던 이 정자는, 건축 그 자체가 수양의 방법이자 철학이었다. 주변에는 주이의 비각과 사당, 관리용 건물들이 자리해 단순한 정자 이상으로 기능했고, 그가 직접 심은 은행나무와 대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황강 물줄기와 함께 흐르는 ‘개비리 오솔길’은 지금도 그 자리를 잇는다.
벽한정
04. 푸르고 고요한 마음이 머무는 곳, 벽한정
용주면 손목3길 언덕 너머, 강 가까운 자리에 조용히 놓인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무민당 박인이 학문을 닦고 유림들과 성리학을 토론하던 자리, 바로 벽한정이다. 푸른 강물과 찬 바람이 만나는 이곳에 ‘푸를 벽(碧)’, ‘찰 한(寒)’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1639년에 지어진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로, 좌측과 정면에 널찍한 마루를 깔고 계자난간(닭 다리 모양의 난간)을 두른 형태다. 남명 조식의 사상을 잇는 대표 사숙 제자로 알려진 박인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향약을 펼치며 삶을 다듬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뒤에는 자신의 호를 ‘무민당(無悶堂)’이라 고쳐, 세상의 고통을 마음속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정자 안팎에는 과시 없는 학인의 결이 담겨 있다. 바람처럼 머물며 사유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지금도 벽한정의 기둥과 마루를 타고 흐르고 있다.
05. 정자란, 자연을 닮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합천의 누정들은 물가에 앉아 세상을 멀리 바라본다. 빗물이 강으로 떨어지는 함벽루, 속세의 소음을 밀어낸 농산정, 휘어진 기둥을 품은 호연정, 고요한 마음이 머무는 벽한정까지. 이들은 단지 멈춰 선 풍경이 아니라, 자연을 닮으려 했던 사람의 마음 그 자체다. 선비들은 이름을 알리기보다 조용히 자신의 길을 좇았고, 흐르는 물과 마주 앉아 자신을 다듬었다. 누정은 그들에게 집이자 서당이었고, 사유의 창이자 벗이었다. 합천의 누정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그 위에 깃든 정신이 아직도 우리 곁에 머문다는 뜻이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나를 들여다보는 자리. 그 자리는 지금도 황강을 따라, 바람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
참고 지역N문화 선비문화의 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