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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68 발행월 : 202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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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 [경남로케이션] 필름 속 풍경을 따라 걷다(양산 법기수원지, 진주 진양호, 김해 은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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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9 / 25-04-23 정성욱 사진 경남문화예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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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속 한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이야기만의 힘은 아니다. 인물의 말 너머로 스쳐간 풍경, 창밖을 지나던 나무 한 그루, 조용히 흐르던 강가. 그 배경은 말보다 오래 감정을 붙잡는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따라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장면이 머물렀던 공간을 직접 걸으며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 여행. 그중에서도 봄이라는 계절과 유독 잘 어울리는 세 곳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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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법기수원지, 고요가 흐르는 숲길

숲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용해진다. 양산 법기수원지는 그런 공간이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나무에 먼저 시선을 빼앗긴다. 높이 30~40미터에 달하는 개잎갈나무들이 줄지어 선 숲길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 지혁은 이 길 위에서 지원에게 조용히 위로를 건넨다. 바람이 가볍게 흔들리는 숲길은 그 장면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말보다 풍경이 먼저 감정을 전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길일 것이다. 법기수원지는 1932년,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저수지다. 한때는 상수원 보호를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지만, 2011년 개방 이후로 법기수원지는 조용히 입소문을 타며 산책과 휴식의 장소로 자리잡았다. 드라마에 등장하며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이곳의 진가는 화면 밖에서 더 분명해진다. 숲은 말이 없고, 풍경은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켜왔다. 오래 지켜본 사람일수록, 이 길이 품은 시간의 결을 더 또렷이 느낀다.봄이면 벚꽃이 수면을 따라 피어나고, 여름엔 숲이 짙게 들어찬다. 가을엔 잎이 노랗게 물들고, 겨울엔 그저 고요해진다. 계절마다 풍경은 다르지만, 이 길을 걷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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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진양호, 마음이 잠시 쉬어가는 호수

진양호는 진주 가까이에서 조용한 시간을 품고 있는 호수다. 시민들에겐 익숙한 쉼터이고, 낯선 이들에겐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걷기보다 머무는 데 더 어울리는 이곳에서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 물비늘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충분히 채워진다. 이 호수는 1970년, 남강댐 건설로 조성된 인공 호수다. 진주시의 식수원이자 낙동강 유역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하다. ‘진양(晉陽)’이라는 진주의 옛 지명에서 이름을 따온 이 호수는 규모에 비해 풍경이 과하지 않다. 정돈된 산책로와 잔디밭, 멀리 낮게 깔린 하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곳이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는 주인공 무진이 해가 지는 호수를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이야기 속에서 그 순간만큼은 유난히 고요했다. 진양호는 극 중에서처럼, 감정을 잠시 가라앉히고 숨을 고르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을 품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로 북적이지만, 평일 오후나 이른 아침엔 한결 조용하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거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정리하는 사람들.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이곳에선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노을이 물드는 저녁 무렵, 호수 너머로 해가 천천히 기울면 풍경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빛을 띤다. 준비 없이 찾아도, 잠시 머물다 가도 괜찮은 곳. 진양호는 그런 시간을 천천히 건네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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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은하사, 말없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산사

분성산 자락, 오래된 소나무 숲을 따라 걸어가면 은하사에 닿는다. 산사라기보다 풍경 하나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차츰 작아지는 발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로 절의 기운이 조용히 스며든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 등장하는 숲길과 마당, 전각은 모두 이곳 은하사의 실제 풍경이다. 영화 속 유쾌한 장면과는 달리, 이곳은 묵직한 고요와 단단한 침묵을 품고 있다. 스님들의 수행이 아니라도, 누군가의 마음 하나쯤은 충분히 정돈될 수 있는 분위기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다. 하지만 법당들과 큰 종이 걸린 법종루, 마당 한켠의 고목과 연못까지, 단정하게 구성된 공간들은 저마다의 결을 지니고 있다. 대웅전 수미단에는 허황옥과 관련된 쌍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정면과 측면이 같은 정사각형 형태의 맞배지붕 건물은 이곳만의 고요한 개성을 더한다.


봄이면 숲길에 연둣빛이 번지고, 가을에는 낙엽이 조용히 땅을 덮는다. 계절의 색이 크게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천천히 걷는 이의 감정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진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풍경은 그런 곳에서 만들어진다. 기도를 하러 오는 이도 있고, 그저 걸으러 오는 이도 있다. 목적이 무엇이든, 은하사는 말이 없어도 마음을 받아주는 곳이다. 사진이 아니라 기억 속에 남기는 한 장면이 필요한 날, 이곳은 그에 꼭 맞는 배경이 되어준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풍경

장면은 지나가고 계절도 바뀌지만, 어떤 풍경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카메라 밖에서 다시 만나는 그 장소는 더 이상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을 쌓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멈춘다. 어떤 이는 말없이 위로를 건네고, 또 다른 이는 그 고요 속에 생각을 내려놓는다. 양산의 숲길, 진주의 호숫가, 김해의 산사는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붙잡는다. 필름 속 장면을 따라 걸었지만, 그 풍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조용히, 천천히, 제 할 일을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