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인문학 경남 여행] 경남미식인문학 3탄 - 섬진강을 먹다. 하동의 맛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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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6 / 25-11-27 글 김봉임 사진 백동민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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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녹차밭과 섬진강
섬진강이 빚은 고장
하동의 밥상
하동의 음식은 자연의 결을 닮았다. 지리산의 물이 섬진강으로 흘러내리고, 강은 바다로 이어진다. 산·강·바다가 맞닿은 이 작은 고장은 수천 년 동안 한결같이 자연의 시간을 밥상 위에 올려왔다. 하동의 맛은 조리의 기술보다 기다림의 미학에 가깝다. 가난했던 시절, 강변의 아낙들은 물옷을 입고 하루 종일 섬진강 속을 뒤졌다. 허리를 굽히고 거랭이로 모래를 긁어 모은 재첩 한 줌이 그날의 끼니였다.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던 그 국물이 훗날 ‘하동 재첩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장터로 향하던 여인들의 외침 “재첩국 사이소!”는 단순한 판매 구호가 아니라, 생존의 언어였다. 지금도 섬진강 포구에는 해 질 녘이 되면 재첩을 채취하는 풍경이 이어진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허리에 대야를 묶은 아낙들이 강바닥을 훑는다. 그들이 건져 올리는 것은 조개가 아니라 하동의 역사다. 이 강에서 시작된 음식 문화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어온 생활의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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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국물의 얼굴
재첩, 하동의 정직한 맛
하동 재첩은 맑은 물에서만 산다. ‘재첩 많은 곳이 1급수’라는 말은 섬진강의 자부심이다. 한때 하류의 모래가 토목공사로 퍼 올려지며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왔고, 재첩은 점차 상류로 밀려났다. 그래도 강의 생명은 꺼지지 않았다. 군에서는 종패를 뿌리고, 주민들은 새벽부터 강으로 나간다. 그 꾸준함이 오늘날 ‘하동 재첩’이라는 이름값을 지켜왔다. 하동의 재첩국은 화려하지 않다. 들고 마셔야 제맛이 난다. 간은 오로지 소금뿐, 어린 부추로 찬 성질을 덮는다. 입안에서 퍼지는 감칠맛은 조미료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의 깊이다. 맑은 국물 한 모금은 섬진강 전체를 삼키는 일이다. 재첩은 국물로만 끝나지 않는다. 파래김에 싸서 먹는 재첩무침, 얇게 눌러 구운 재첩전은 소박하지만 완성된 맛이다. 양념은 세지 않다. 배즙과 초고추장을 살짝 더해 재첩살의 단맛을 살린다. 이곳에서는 세월의 손맛보다 강물의 맛이 먼저다. 그 자체로 완전한 요리, 그것이 하동 재첩이다.
강이 차리는 사계
참게, 은어, 벚굴 그리고 악양 대봉감
섬진강은 계절마다 다른 맛과 향을 낸다. 봄이 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와 함께 벚굴이 핀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하동 고전면 신방마을 앞 강변, 수심 3~4미터 지점에서 잠수부들이 직접 내려가 손으로 캐 올린다. 손바닥보다 큰 벚굴은 구이·찜·전·죽으로 변주된다. 짧은 3개월 동안만 맛볼 수 있어 ‘봄 한정 미식’이라 불리며 제철의 맛을 자랑한다. 여름의 섬진강은 또 다르다. 투명한 은빛 몸의 은어가 떼를 지어 오르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은어밥’은 하동의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은어의 내장을 도려내고 갓 지은 밥에 머리를 꽂아 익히면 은어 특유의 향이 밥에 스며든다. 씹을수록 수박 향이 나는 그 미묘한 맛은 강이 선물한 자연의 향수다. 참게는 ‘서리 내릴 무렵 소 한 마리 값’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귀한 별미였다. 껍데기째 빻아 푹 끓여 만드는 ‘참게가리장’은 못살던 시절의 지혜가 낳은 음식이다. 단백질이 귀하던 시절, 강에서 나는 게는 마을 전체의 영양제였다. 지금은 참게탕, 참게장, 참게가리장국으로 이어져 관광객의 미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동의 달콤한 마무리는 악양 대봉감이다. ‘과실의 왕은 감, 감의 왕은 대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크고 육질이 좋다. ‘높은 산에 볕이 잘 든다’는 뜻의 악양(岳陽) 지명처럼, 햇살이 만든 단맛이 핵심이다. 홍시와 곶감은 물론, 요즘에는 냉동 홍시 아이스크림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이 고장의 단맛은 설탕이 아니라 햇빛과 시간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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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품은 차의 땅
향으로 이어지는 시간
하동의 또 다른 얼굴은 차(茶)다. 신라 흥덕왕 때 대렴 공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를 처음 심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천 년 넘게 이어온 차의 역사는 하동을 ‘한국 차 문화의 원점’으로 만든다. 쌍계사를 중심으로 한 하동 다원 8경—차 시배지, 명원다원, 고려다원, 삼우다원, 도심다원, 쌍계야생다원, 차공간, 매암다원은 각각의 풍경과 향을 간직하고 있다. 십리벚꽃길 아래 운무 속의 야생 차밭, 돌 틈 사이로 자라는 차나무 그리고 차를 마시며 들려오는 새소리. 하동에서는 한 잔의 차가 음료가 아니라 삶의 태도이자 정신의 의식이다. 맑은 물, 기름진 흙, 따뜻한 햇살.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향은 하동 사람들의 마음과 닮아 있다. 재첩국이 몸을 덥힌다면, 하동의 차는 마음을 덥히는 국물이다.
강이 요리하고,
사람이 간을 맞춘다.
하동의 맛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정직하고 꾸준하다. 섬진강의 물소리, 강 위의 안개, 아낙들의 손끝, 햇볕 아래 말리는 감, 차밭에 서린 이슬, 그 모든 풍경이 한 상의 밥으로 이어진다. 하동의 음식은 단순한 향토 음식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써 내려간 생활문화의 기록이다. 강은 오늘도 흘러가지만, 그 속의 맛은 변하지 않는다. 재첩은 여전히 맑은 물을 가르고, 참게는 단풍과 함께 오르며, 차향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이어진다. 한 그릇의 재첩국, 한 모금의 차, 한 알의 대봉감. 그 안에는 하동의 삶과 시간이 녹아 있다. 하동의 맛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섬진강을 입에 담는 일이다. “강이 요리하고, 사람은 삶으로 간을 한다.” 하동의 한 끼는 오늘도 그렇게, 자연과 함께 익어간다.
참고 경남도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