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 검색

Vol.71 발행월 : 2025. 06

close
게시물 검색

이슈&트렌드 [인문학 경남여행] 우리나라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경남의 누각과 정자 - 시간이 멈춰 서 있는 곳 거창의 누와 정

페이지 정보

vol. 71 / 25-06-26 글 김봉임 사진 거창군

본문

거창의 누와 정은 단순히 오래된 문화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사라지지 않은 선비들의 마음이 살고 있다. 여전히 물이 흐르고, 바람이 머무르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누와 정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정신이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01. “여기, 시간은 멈춰 있습니다”


거창 위천 강변을 걷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걷게 된다. 청량한 물길을 따라 송림이 우거지고, 하얀 암반 위로 정자 하나가 다가온다. 용암정에서 수승대까지, 불과 1km 남짓한 길. 하지만 그 길 위에는 수백 년을 살아낸 선비들의 발자취가 겹겹이 쌓여 있다. 이 길은 단순한 둘레길이 아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풍경 속 철학서’다. 눈앞에 펼쳐진 절경이 ‘산수화’라면 그 풍경을 감상하고 음미하는 정자는 마치 붓끝 같은 존재다. 거창의 위천은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가 되는 곳이다. ‘합수(合水)’의 기운이 서린 이곳은 예부터 ‘길지’로 불리며, 자연이 품은 기운에 기대어 사유하려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 정자들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자연과 사유의 경계에 놓인 공간’이었다.


0e3cd384c5b34963d891938315fc21de_1750916107_1195.jpg
구연서원



02. 용이 쉬어간 자리, 용암정


자연 암반 위에 떠오르듯 서 있는 정자 하나. 바로 용암정이다. 1801년, 임석형이 지은 이 정자는 학문보다는 ‘삶의 자세’로 정자의 정신을 채웠다. 임석형은 과거 시험에도 관직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의 정자에는 ‘권력’보다 ‘풍류’가, ‘성공’보다 ‘겸허’가 깃들어 있다. 그의 시에 따르면, 용암정은 “삼대가 경영하여” 지은 정자였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건축이 아니라, 가족의 기억과 뜻이 누적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세대의 시간’이 자연 속에 함께 쌓인 것이다. 건축적으로도 흥미롭다. 자연 암반 위에 기둥을 세우고, 한쪽에 온돌방을 둔 구조는 단순한 쉼터 그 이상이었다. 정자의 한 칸, 한 칸은 삶을 정돈하는 틀이었고,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창이기도 했다. 정자 앞 바위에 새겨진 ‘용암정’ 세 글자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정자의 존재감을 새기듯 강렬하다. ‘청원문’, ‘환학란’, ‘반선헌’ 같은 편액들은 마치 작은 시구처럼 정자의 성격을 말해준다. 신선의 소리를 듣는 문, 학을 부르는 난간, 반쯤 신선이 된 집. 모두 신선 세계를 동경하던 선비들의 이상향이자, 자연 속에서 고요히 존재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위천의 풍경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작고 깊은 바람이 흘러든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정자 문화는 은둔과 유람, 자아 성찰의 공간으로 진화해 간다. 용암정은 그 대표적인 예다.


0e3cd384c5b34963d891938315fc21de_1750915862_9845.jpg
용암정의 봄




03. 물을 좋아했던 사람 신권이 세운 요수정(樂水亭)


용암정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요수정’이 보인다. 1542년, 조선 중종 때 지어진 이 정자는 당시 향교 훈장 신권이 세운 것이다. 신권은 학문이 깊은 인물이었지만, 세속적인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거창 지역 유생들을 가르치며, 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고자 했다. ‘요수(樂水)’는 그의 호이자,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다. 논어에 나오는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따왔다. 즉, 지혜로운 사람처럼 유연하고 깊이 있게 흐르기를 바란 것이다. 요수정에 걸린 시문을 보면 그의 인격이 엿보인다.


“산수 사이에 정자를 지으니, 물을 사랑한다고 산을 버린 것 아니네.”


0e3cd384c5b34963d891938315fc21de_1750915916_0147.jpg
요수정



04. 사신을 떠나보내며 무사귀환을 염원하던 수승대(搜勝臺)


요수정 건너편에는 바위 하나가 있다. 이름하여 수승대.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이곳엔 역사적 일화도 가득하다. 원래 이 바위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근심하며 전송한다’는 뜻이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였던 이곳은, 사신을 떠나보내고 무사 귀환을 염원하던 장소였다. 하지만 1543년, 이곳을 지나던 퇴계 이황이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승(勝)’은 경치가 뛰어남을 뜻한다. 퇴계의 제안은 시 한 수에 담겼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 못 만나

마음속에 상상만 더해가네

뒷날 술 한 동이 안고 가

큰 붓 잡고 구름 벼랑에 시 쓰려네.”


신권은 퇴계의 시에 감복하여 바위에 ‘수승대’라 새기게 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권의 처남 임훈은 이에 불만을 품고, ‘수송대’를 지키려는 시를 한 편 남긴다.


“봄은 점점 저물고 그대도 떠나가리니

봄을 보내는 근심만이 아니라

그대 보내는 시름도 있다네.”


두 시는 지금도 거북바위 위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 얼마나 시적인 다툼인가. 한자 한 자 속에 깃든 감정과 자존심 그리고 그 시대의 품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0e3cd384c5b34963d891938315fc21de_1750915998_3882.jpg
수승대



05. 정자는, 앉아 쉬는 곳이 아니다.


조선시대 정자는 단순한 ‘풍류의 장소’가 아니었다. 공간은 곧 사유였고, 그 사유는 글과 삶으로 이어졌다. 정자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철학적 실험장이었다. 특히 거창의 정자들처럼, 벼슬길과는 거리를 둔 ‘향촌 지식인’들이 세운 정자일수록 그 안엔 더 진솔한 일상과 철학이 녹아 있다. 정자는 나를 다잡는 곳이자,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망루였던 셈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세계관이 담긴 작은 건축물’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대의 정(情)을 엿본다.


거창 누정 둘레길 코스

• 코스: 용암정 → 요수정 → 수승대 → 구연서원 → 관수루

• 소요 시간: 천천히 걸으면 1시간 반

• 추천 Tip: 종이와 펜을 챙기자. 정자에서 시 한 수 남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