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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7 발행월 : 202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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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트렌드 [인문학 경남 여행] 지붕 아래 남은 정신, 진주의 누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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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3 / 25-08-28 글 정성욱 사진 진주시 진주문화관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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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는 오래된 시간을 품은 누각과 정자들이 남강과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절의와 학문, 풍류와 기억이 겹쳐진 이 공간들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의 상흔을 견디고, 붓과 시로 마음을 다스리던 선비의 자취도 여기 있다. 진주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다섯 채의 누정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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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대표하는 누각, 촉석루(矗石樓)

진주의 역사와 기억이 남강 절벽 위에 선 듯 촉석루는 오늘도 도시의 풍경을 단단히 지탱한다.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고종 때 진주 목사 김지대에 의해, 이후 여러 차례 중건과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으나, 1960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졌다.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 삼대 누각’으로 불렸으며, 논개의 의거로도 잘 알려졌다. 전란 이전에는 연회와 향시, 시회가 열리던 풍류의 중심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그 의미는 달라졌다. 강물 위 섬처럼 솟은 바위에서 논개는 적장을 끌어안고 투신했고, 그 바위는 지금도 ‘의암’으로 불린다. 한때 진주의 경승을 노래하던 시인들도 이후에는 달라진 감회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조선 초기 진주 목사 유호인이 “푸르고 아득한 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읊었다면, 임진왜란 이후 하진은 이렇게 적었다.


“전란의 상처 온 나라에 가득하니 홀로 누각에 기대어 피리를 부네. 외진 성에 저녁노을 잦아지고 저자에는 바람 불어 아지랑이 걷히어 가네.”


풍경은 달라졌지만, 그 자리에서 이어져 온 기억은 여전히 깊다. 강 위에 드리운 촉석루의 그림자는 지금도 진주라는 도시의 품격과 정신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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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서예의 누각, 비봉루(飛鳳樓) 

비봉루는 진주의 진산 비봉산 기슭에 세워진 누각으로,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장구지소(덕망이 있는 사람이 다녀간 곳)로 전해진다. 후손 정상진이 1939년 지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와 3익공계 공포 형식을 갖춘 단정한 형태다. 1374년, 진주에 머문 포은은 이곳에서 한 수의 시를 남겼다. 


“비봉산 앞에는 비봉루가 있고, 누각에 든 나그네는 꿈속을 거닐며, 지세는 빼어나고 인물은 걸출하니, 그 이름은 강처럼 오래 흐르리라.”


비봉루는 진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소이자, 예술제와 백일장 등이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동편 관리사는 정명수 선생의 서실 겸 차실로 쓰였으며, 유리창과 계자난간 등이 절충식 구조 안에 어우러져 있다.서예가 은초 정명수는 이곳에서 평생을 머물며 촉석루, 진남루 등 수많은 현판을 남겼다. 글씨는 단지 멋이 아니라 사람의 결을 드러낸다는 말처럼, 비봉루는 그 정신이 스민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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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속 결의, 고산정(孤山亭)

진주시 대평면 깊숙한 산자락, 나무들 사이에 고요히 들어선 고산정은 조선 선비의 절의가 스며 있는 곳이다. 학포 정훤은 광해군의 치세에 뜻을 같이하지 않고 합천을 떠나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외로운 산 속 정자’란 이름처럼 고산정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고결한 삶을 지향한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정자와 사당이 앞뒤로 놓인 구조는 조선 누정의 격식을 따르면서도, 바닥을 높여 세운 누각형 양식이 단아한 긴장감을 전한다. 지붕 네 귀에 얹힌 활주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 구조, 계자난간이 둘린 툇마루까지, 은둔자에게도 미감은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정자는 본래 고산에 있었으나, 진양호 수위 상승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빗속의 방문이 더욱 적막했던 날, 정자 주변을 감싼 아카시아 꽃의 향기와 나무 그림자는 한 시대를 외롭게 견딘 선비의 자취를 대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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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자취, 우곡정(隅谷亭)

진주시 사봉면에 자리한 우곡정은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이 조선 개국에 뜻을 달리해 은거하며 지은 정자다. 1393년, 조선 태조 2년에 세워진 이곳은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의 충절을 실천한 삶의 자취이자, 후대에 충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정온은 왕명이 내려오자 시력을 잃은 척하며 초청을 거절했지만, 진위를 확인하려 찔러본 솔잎 끝에도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선혈만 흘렀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해진다. 눈을 감은 채 스스로 선택한 길, 우곡정은 그런 결연한 마음을 품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박한 규모로, 전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마루가 누각처럼 꾸며졌고, 뒤편에는 조용한 방과 아궁이가 자리 잡고 있다. 대문 밖 앞뜰에는 정온이 직접 파고 낚시를 즐겼다는 연못이 지금도 원형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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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의 정신, 부사정(浮査亭) 

진주시 금산면의 한적한 언덕 중턱, 팔작지붕 아래 옛 학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성여신(1546~1632)의 제자들이 스승의 호를 따서 세운 부사정이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유학의 도를 잊지 않으려 했던 이들의 뜻이 이곳에 담겼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문인이자 경상우도 유림의 중심 인물이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절의를 지키고, 제자들에게 학문과 도리를 가르쳤다. 부사정은 그러한 정신을 실천하는 배움의 장이었다. 1785년 큰 화재로 주변 17동이 소실되었으나, 부사정은 그 형태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마루와 방을 모두 열면 공간이 하나로 통한다. 건물 좌우엔 ‘반구정’과 ‘부사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정자 주변에는 후학들의 거처였던 부속 건물들이 남아 있다. 불타버린 건물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켜온 정자는 유림의 정성과 기억으로 다시 일어섰다. 지금도 부사정은 조선 중기 유교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유적이자, 진주의 정신사에 깃든 의미 깊은 건축물로 남아 있다.


지켜낸 자리에서 이어지는 사유

강 위에 떠오른 충절, 산속에 깃든 절의, 마루에 흐르던 학문의 숨결까지. 이들은 오늘의 진주가 단단해질 수 있었던 정신의 뿌리이기도 하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자리에 머문 누정들은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자리를 지킨다는 것, 그 자체로 남은 이들의 사유가 된다.


 참고 지역N문화 선비문화의 산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