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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1 발행월 : 202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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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토크 [세계 속 경남] 극단 벅수골, 통영의 심장에서 세계의 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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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2 / 25-07-23 글 김보배 사진 극단 벅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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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눈빛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올해 체코 소우카니 오스트로프 국제연극축제의 공연장.국적도 언어도 다른 관객들이 하나같이 숨을 죽인 채 바라보던 무대 위엔, 경남 통영의 연극인들이 서 있었다. 극단 벅수골. 지역에 뿌리를 두고 40여 년을 걸어온 그들은 이제, 세계를 향한 진심 어린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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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 국경도 넘어서: 창작극 <더 홀>, 유럽에 서다 

체코에서 선보인 창작 넌버벌극 <더 홀(The Hole)>은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한 남자의 내면을 조명한 작품이다. 말없이 움직이고, 침묵 속에서 강한 울림을 전하는 이 무대는, 국적과 언어가 다른 관객들로부터 세 번의 커튼콜을 이끌어냈다.


“배우들의 유연한 몸짓과 강렬한 눈빛에 빠져들었다고 말하던 관객들, 울컥했다고 눈물 글썽이며 포옹해 준 사람들···. 그 순간 우리는 예술이 사람을 연결하는 언어임을 다시금 체감했습니다.” — 제상아 ‘벅수골’ 기획사무국장


공연 후 열린 워크숍에서는 “내면의 고뇌를 깊이 있게 풀어낸 숙련된 무대”라는 평이 이어졌고, 유럽 여러 도시에서의 순회공연 요청도 받았다.지역 예술단체의 공연이었지만, 그 무대 위엔 전 세계를 감동시킬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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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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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오스트로브 사장님과(단체간의 컨퍼런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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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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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후 세미나 




<더 홀>, 기억과 책임을 향한 연극

<더 홀>은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그 대신, 인간의 기억 속에 남은 전쟁의 흔적—망각과 왜곡, 외면과 책임에 대한 질문을 천천히 꺼내놓는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 극 중 중심을 이루는 질문


이 질문은 관객의 내면 깊숙이 침투했고, 무언의 연극은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했다. 그 속에는 고통과 치유 그리고 인간의 윤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 있었다.



벅수골, 통영의 역사로부터 시작되다 

극단의 이름 ‘벅수골’은 통영 세병관 앞 돌장승에서 비롯됐다.조선시대 민간이 재앙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벅수의 마을, 그 지명의 의미를 이어받은 벅수골은 1982년 창단 이후 지금까지 ‘예술의 지향점은 평화와 안녕’이라는 믿음으로 무대를 지켜왔다.


“관(官)이 아닌, 민(民)이 세운 벅수.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통해 전하고 싶은 철학과 닿아 있습니다.” — 제상아 <벅수골> 기획사무국장


벅수골은 통영의 인물, 역사, 해양, 환경, 민속 등을 무대에 옮기며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신념을 증명해 왔다.창작극 <하얀 파도>는 환경 파괴와 해양쓰레기, 대기업 유치 문제 등 지역의 현실을 생생히 담아내며 제42회 경남연극제 대상을 수상했고, 그 의미는 통영을 넘어 한국 연극계 전반에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미항 통영, ‘국제연극도시’를 꿈꾸다

벅수골은 단순히 해외 공연 초청에 만족하지 않는다.글로벌 예술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통영을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이미 이탈리아 ‘디오스쿠리(TEATRO DEI DIOSCURI)’ 극단과의 협업을 통해 통영연극예술축제를 국제적인 교류의 장으로 확장하고 있고, 유럽 13개 연극 단체와 업무협약(MOU)도 체결한 상태다.


“공연예술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언어도 인종도 넘어, 우리는 통영에서 세계를 잇는 소통의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 제상아 ‘벅수골’ 기획사무국장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해외 진출’이 아니다.‘미항 통영’이 ‘국제연극도시 통영’으로 도약하는 것.벅수골은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지역에서 세계로, 삶에서 예술로

벅수골은 지역성과 예술성 그리고 인간적인 진심을 바탕으로 글로컬(glocal) 연극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들이 만든 연극은 지역의 이야기를 세계의 언어로 말하고, 한 사람의 고통을 모두의 울림으로 승화시킨다.

이번 체코에서의 공연은 단지 ‘한 번의 성공’이 아니다.그건 40여 년간 걸어온 길의 정직한 결과이자,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서막이다.


“우리는 통영에서 시작하지만, 무대는 세계로 열려 있습니다.”

극단 벅수골은 오늘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무대의 문을 연다.그 무대는 말없이 더 깊이, 더 멀리 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