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토크 [주목! 청년] 나무의 결을 따라 흐르는 마음 - 목공예 작가 장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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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6 / 25-11-27 글 김보배 사진제공 장지현본문
나무는 빠르게 완성되는 재료가 아니다. 결을 읽고, 방향을 다듬고,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경남 김해에서 목공예를 하는 장지현 작가는 그 느린 과정 안에서 지역의 역사와 오늘의 감각을 잇는다. ‘목리(木利)’ 나무로 이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 그 이름처럼, 그녀는 오래된 유물 속 유쾌함을 발견하고 작은 조각 하나에 기억과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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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문화유산을 작품으로
올가을, 장 작가는 ‘경남콘텐츠코리아랩 상상무한대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가야왕국 우드퍼즐’. 김해의 정체성을 담은 가야 유물 여섯 가지를 원목 큐브에 새겨 보드게임형 교육 콘텐츠로 확장한 프로젝트다. 수상 소식을 들은 날, 그는 작업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수상 소식을 듣고 길에서 폴짝폴짝 뛰었어요. 도중에 아이디어도 바꾸고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거든요. ‘제발 무사히만 끝내자’라는 마음이었는데 도파민 폭발이었죠.”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수차례 밤을 새웠다. 레이저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연마 후 나무 가루를 털어내는 손짓, 큐브가 정확히 맞물리는지 확인하는 작은 테스트. 단순히 ‘나무 큐브 하나 만들자’가 아니었다. 지역 문화의 결을 현대적 포맷에 맞게 설계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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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를 16개의 나뭇조각으로 이해하는 방식
‘가야왕국 우드퍼즐’은 총 16개의 원목 큐브로 이루어져 있다. 큐브 네 개씩 네 줄, 정사각형으로 맞추면 한 유물 그림이 완성된다. 큐브는 금관가야의 금관, 유려한 곡선의 수정목걸이, 김해의 상징 같은 수레바퀴 모양 토기, 김해 마스코트 ‘토더기’의 원형이 된 오리 모양 토기,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철갑옷, 국내 발굴 사료로 의미가 큰 파형동기로 가야 유물 여섯 가지가 한 세트에 담긴다. 아이들은 정답을 보는 대신 패턴 카드를 뽑아 방향과 순서를 맞춘다. 패턴과 디자인에 대한 이해, 상상력, 유물 정보까지 함께 돌아가는 게임 방식이다. 작은 나무 상자에 큐브, 카드, 유물 설명지가 들어 있다. 특히 설명지는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초등생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장 작가는 김해 봉황동 유적지를 산책하며 떠올린 라인, 박물관 유물들 앞에서 익힌 비례감, 아이들이 큐브를 뒤집는 동작까지 상상하며 게임 규칙을 설계했다.
“유물 그림에도 장난스러운 요소를 넣었어요. 가야 유물 자체에 재치가 많거든요. 그 점이 보드게임 감성하고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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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것에서 ‘배우고 즐기는’ 콘텐츠로
처음부터 교육 콘텐츠를 만들려던 건 아니다. 다양한 유물을 한 판에 꽉 채운 오브제 퍼즐을 구상했는데, 막상 제작 단계에 들어가자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두꺼운 합판을 자르고 얇게 켜서 조립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복잡한 유물은 오차가 생겼다. 유물의 굴곡이 자연스러울수록 오브제로는 아름답지만, 퍼즐로는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상상무한대 멘토링 과정이 계기가 되었다.
“멘토님이 ‘교육성’이라는 키워드를 짚어주셨어요. ‘예쁘기만 하면 한두 번 하고 말아요. 재미와 정보가 함께 있어야 오래 남죠’라고요.”
이후 과정은 거의 실험에 가까웠다. 레이저 각인과 UV프린트를 비교하며 나뭇결이 살아나는 재현 방식을 찾았고, 큐브는 아이들이 뒤집을 때 걸림이 없도록 0.1mm 단위로 수정했다. 패턴 카드는 난도를 나누어 ‘정답 확인’이 아니라 ‘스스로 맞춰보는 재미’를 설계했고, 색은 김해시 공식 컬러 팔레트를 참고해 유물의 온도와 현대 감성을 동시에 담았다.
작업실의 기억 - 아버지가 남긴 온도
‘목리’라는 이름은 2022년 처음 생겼다. 업체 명을 고민하던 밤, 아버지가 툭 건넨 한마디가 출발점이었다. “목리 어때? 나이테처럼.” 장 작가의 아버지는 김해에서 30년 넘게 목공예 한길을 걸어온 장인이었다. 아버지의 공방에는 항상 켜켜이 쌓인 나무 냄새와 톱밥이 있었고, 작은 망치 자국과 수십 번 덧댄 바이스 흔적이 가득했다. 장 작가는 어린 시절을 그 공간에서 보냈다.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뛰놀 때, 그녀는 작업대 아래에서 떨어진 나뭇조각을 주워 들고 아버지 옆에서 조용히 사포질을 따라 했다. 본드가 손가락에 붙어 굳으면 신기해했고, 끌이 나뭇결을 밀어내는 소리를 장난감보다 더 가까이 두고 자랐다. 본격적으로 나무 앞에 선 건 2020년이었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공방에 일손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 도구를 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무게와 책임이 지금의 길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아버지는 상호를 지어주시고 그해에 떠나셨어요. 그래서 ‘목리’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제가 계속 걸어가야 하는 방향이에요.”
지역에서 만든 이야기, 지역에서 자라는 콘텐츠
“가야 문화권이라는 건 엄청난 자산이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보려면 현대적 감각이 필요하죠.”
장 작가는 지역 기반 창작자들의 강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녀는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의 공모 지원사업과 워크숍 등을 통해 시제품 제작과 발표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손끝에서 형태를 갖춰가고, 피드백을 거치며 다시 다듬어지는 경험이었다.
“상상무한대 공모전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디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졌을 거예요. 목공예는 시제품 제작에 비용이 많이 들거든요. 흘러가던 생각이 실제로 손에 잡히고, 문제를 발견하고, 다시 개선할 수 있었던 건 지원 덕분이었죠.”
지역은 느리지만, 대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다. 물량이나 속도로 승부하는 대신, 한 조각의 나무가 바람과 시간을 견디듯 창작 역시 오래 남는 방식으로 자란다. 그녀는 지역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결국 지역에서 가장 단단하게 자라난다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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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프로젝트, 조금 더 가벼운 숨 ‘Messenger’
요즘 그녀는 오리 모양 토기에서 착안한 ‘Messenger’ 모빌 작업도 병행 중이다. 오동나무를 얇게 켜고, 균형을 맞춰 천천히 매다는 방식. 지난 9월 김해한옥체험관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한 점 한 점, 균형과 간극, 여백과 흔들림을 조절하는 작업이다.
“오리 모양 토기(유물)에 담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전달자’라는 상징이 마음에 남았어요.그 의미를 좀 더 가볍고 유쾌한 오브제로 이어가고 싶었죠.”
이 프로젝트는 퍼즐보다 더 느리고, 더 조용한 결을 갖는다. 시장성보다 표현이 앞서고, 형태보다 감각이 먼저다. 그러나 두 작업은 같은 질문을 품는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그리고 장 작가는 그 답을 서두르지 않는다. 나무를 매만지는 속도 그대로, 시간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듯 조용히 다음 결을 쌓아가고 있다. 오늘도 장 작가의 작업대 위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나뭇조각들이 놓여 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손끝으로 결을 따라 쓰다듬고, 천천히 다음 조각의 방향을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