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트렌드 [컬처탐색] 봄 그리고 43번째 막이 오른다 – 제43회 경남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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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8 / 25-03-28 글 정성욱 사진 (사)한국연극협회 경상남도지회 제공본문
지난 3월 18일부터 4월 1일까지 연극의 도시 경남 거창에서 ‘제43회 경남연극제’가 열렸다. ‘연극은 인간이다’를 주제로 하는 이번 연극제는 (사)한국연극협회 경남지회가 주최하고 거창지부가 주관한 이번 연극제에는 경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14개 연극단체가 참여해 다양한 무대를 선보였다. 각 극단은 저마다의 개성과 연출 방식으로 무대를 채우며, 연극이 가진 본연의 힘과 예술적 가치를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01 연극으로 물드는 봄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연극계가 기지개를 켠다. 봄이 오면 연극의 무대도 새롭게 펼쳐진다. 경남 연극인들의 창작열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무대, 경남연극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막을 올렸다. 1983년 진주에서 시작된 경남연극제는 매년 경남 곳곳을 순회하며 열려왔고, 그동안 연극인들에게는 창작과 발표의 무대를, 관객들에게는 다양한 연극적 경험을 선사해왔다. 연극제가 열린 거창은 오랜 시간 연극과 함께 호흡해온 도시다. 그 무대 위로는 지역의 이야기들이 오르고, 삶의 단면들이 조명받는다. 무대에 오르는 이야기들은 지역의 현실과 정서를 품고 있어, 경남연극제는 곧 지역 사회가 연극이라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관객은 무대 위에 펼쳐지는 삶의 단면들을 마주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웃고, 울고, 생각하게 된다 . 그렇게 무대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은 봄날의 거창을 진한 감정으로 물들였다.
#02 극단별 대표작
비극, 희극, 실험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무대를 채웠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며,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했다. 연극을 통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유도했다. 무대에서 펼쳐진 감정의 소용돌이는 객석의 공기를 바꾸었고, 관객들에게 각기 다른 울림을 선사했다. 그날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작품들을 하나씩 만나보자. 극단 입체 | 연극 인공신장실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투석 환자들에게 기적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식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 생존 기회를 앞에 둔 환자들은 각자의 입장과 욕망을 드러내며 갈등을 빚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본성과 선택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극단 이루마 | 연극 안녕이라 말하지 마
한때 무대를 빛냈던 성철은 이제 늙고 병들었지만, 연극을 향한 열정은 여전하다. 자녀들의 만류에도 병원을 나와, 옛 동료들과 ‘리어왕’ 연습을 시작하지만 간절함과 현실의 한계는 자꾸만 부딪친다.
극단 현장 | 연극 반추
명망 높은 소설가와 그의 가족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오랜 시간 균열을 겪어왔다. 아버지의 냉정한 태도 속에 상처받은 가족들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대표작 ‘반추’를 다시 쓰기 시작하며 이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이게 된다.
극단 메들리 | 연극 구름이 가 닿는 곳
밀양 출신 검무 달인 기생 운심의 삶을 통해 예술과 자유를 이야기한다. 전통 예술과 시대적 억압이 충돌하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특징이다.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 예술가의 도전과 좌절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무대 위에서 풀어낸다.
극단 미소 | 연극 대찬이발소
재개발을 앞둔 동네에서 50년을 지켜온 이발소 주인 대찬의 이야기다. 모두가 떠나길 권하지만, 그는 쉽게 이발소를 놓지 못한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지며 각자의 속내가 드러난다.
극단 창원예술극단 | 연극 스위트 홈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세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허영과 트라우마, 갈등이 얽히며 집이 지닌 의미를 다각도로 탐색한다. 때로는 안식처, 때로는 전쟁터가 되는 공간에서 인물들의 갈등이 깊어진다.
극단 고도 | 연극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
삶과 사랑의 의미를 되짚는 두 부부. 이혼 후에도 서로를 완전히 놓지 못하는 중년 부부와, 오랜 세월 함께한 노부부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극단 벅수골 | 연극 숲을 지키는 사람들
전쟁중인 숲속, 남자는 진실과 공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이 나타나 ‘전쟁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공포인가.
극단 나비 | 연극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딸이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결혼을 통해 안정된 삶을 살길 원하는 엄마와, 오디션 준비에 집중하며 결혼에 관심 없는 희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가족과 사랑 그리고 독립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극단 아시랑 | 연극 그대는 봄
오랜 세월을 함께한 세 할머니는 다투면서도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다. 치매에 걸린 친구를 위해 나머지 두 사람이 노력하지만, 세월 앞에서 점점 무력해진다. 자식들에게 외면받아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따뜻한 감동을 준다.
극단 예도 | 연극 0.72 청년시대
투자 실패와 이혼 후 부모 집에 머무는 청년들이 현실을 고민한다. 결혼과 출산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지만, 사랑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청년 세대의 현실을 담백하게 그려내며,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극단 문화모임광대 | 연극 웅녀펜션
지리산의 낡은 펜션 그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는 야생 곰. 곰을 내쫓으려는 펜션 주인, 보호하려는 연구팀, 없애려는 군수까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얽히며 소동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 곰이 단순한 야생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극단 객석과 무대 | 연극 모래를 위한 성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결혼한 하나와 영일. 하지만 기대와 달리 공허함만 깊어간다. 여행지에서 만난 커플과 얽히며 사랑과 관계의 본질을 마주하고, 익숙함을 벗어나려 만든 새 규칙 속에서 결국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는다.
극단 장자번덕 | 연극 바보처럼
바보같이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두 청년, 가진 것보다 꿈이 많은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실은 팍팍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웃으며 나아간다. 작은 푸드트럭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 속에서, 경쟁보다 공존이 더 큰 가치임을 보여준다.
#03 경남연극제가 남긴 울림
제43회 경남연극제는 거창에서 14일 동안 펼쳐졌으며, 참여 예술인 292명, 관객 3,350여 명이 찾을 만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올해의 단체 대상은 창원지부 극단 미소의 ‘대찬 이발소’(장종도 작·연출)가 차지했다. 공동체와 기억, 그리고 변화 앞에 선 개인의 이야기를 따뜻하고도 날카롭게 풀어낸 이 작품은 지역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아우르며 큰 호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진주 극단 현장의 ‘반추’(차근호 작, 고능석 연출), 통영 극단 벅수골의 ‘숲을 지키는 사람들’(이민우 작, 장창석 연출)이 나란히 금상을 수상했다. ‘반추’는 가족이라는 단단하면서도 위태로운 구조를 섬세하게 풀어냈고, ‘숲을 지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와 진실의 경계를 날카롭게 짚어냈다. 연기대상은 극단 현장의 황윤희 배우와 극단 미소의 천영훈 배우에게 돌아갔다. 각각 ‘반추’의 안애신 역과 ‘대찬 이발소’의 대찬 역을 맡아, 인물의 서사를 고스란히 체화한 연기로 무대를 장악했다.
#04 연극은 계속된다
극장은 관객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객석과 맞닿아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경남연극제는 일방적 감상이 아니라,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다. 이번 연극제는 전통적인 희곡부터 현대적 해석을 가미한 창작극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가 마련되어 관객들에게 새로운 연극적 경험을 제공했다. 각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각기 다른 색채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또 다른 무대를 향한 기대가 되어 이어질 것이다. 연극은 조명이 꺼졌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대사가 멈춰도, 그 장면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내년, 제44회 경남연극제는 밀양에서 열린다. 또다시 새로운 무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감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봄, 거창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장면들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 기억 위에, 다음 무대가 다시 세워지기를 바란다.